제8과 행군 중에 생긴 일 (2) - 세 남매의 다툼
민수기 12장
먼저 오늘 본문을 한 번 읽어 봅시다. 그리고 가능하면 4번까지 살펴 봅시다.
1) 아론와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2:1
참고. 창세기 10:8
12:2
참고. 11:25
12장의 시작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0:6-8을 보면, 구스는 함의 아들이고 바벨성 사건의 주모자였던 니므롯의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스인들은 함의 자손입니다. 오늘날 에디오피아 근처에 주로 살았다고 합니다. 구스 여자의 어떤 점 때문에 이들이 비방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비난한 것인지, 십보라 외의 결혼이 한번 더 있었기에 그런 것인지, 그 여인의 어떤 특정한 성격 때문이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2절을 보면 이들의 비방의 핵심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시는데 너 혼자 뭐 그리 잘난 게 있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앞 11장 후반부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70 장로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짐을 덜기 위해 세운 장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가시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특히 성령을 직접 힘입는 이스라엘 장로들에게는 아주 은혜롭고 좋은 일입니다. 이 일 직후에 이러한 비방이 나옵니다. 즉, 무려 "칠십" 장로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 판국에 모세 네가 뭐 그리 잘났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부어주신 은혜의 방편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사람을 비방하는 소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만 우리 일상사에 이런 경우들이 사실 비일비재합니다.
2) 하나님께서 당대에 당신을 알리시던 방편은 무엇입니까?
12:6
참고. 창세기 46:2, 사무엘상 3:15
창세기 31:11, 열왕기상 3:5
12:8
참고. 출애굽기 19:9, 여호수아 1:1
6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당대에 당신을 알리시던 방편이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환상, 꿈, 직접계시. 환상은 종종 이상이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야곱에게 나타나실 때에 사무엘에게 나타나실 때에 이런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야곱에게는 꿈에서도 나타셨고 솔로몬의 꿈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외에도 꿈이나 환상(이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장면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과의 대화를 보건대 미리암과 아론에게도 꿈이나 환상으로 당신을 드러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이나 환상처럼 초현실적인 장면이 아니라 일상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셔서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뉘앙스로 보건대 아마도 미리암과 아론에게는 이 장면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첫 번째 장면이었을 듯 합니다. 여기에 모세가 자기 형제자매인 미리암과 아론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그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 이후 여호수아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 역시 여호수아가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른 위치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3) 하나님이 아론과 미리암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 요지는 무엇입니까?
12:8
이렇게 그들 생애 최초로 직접 등장하신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핵심은 겁도 없이 모세를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너희의 비방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미리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10
참고. 12:3, 예레미야 13:23
12:14-16
참고. 5:1-4
하나님께서 진노의 선언을 하시고 떠나시자 마자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물론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백성의 제사를 계속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므로 미리암만 상징적으로 나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1절에서 모세를 비난할 때의 언급되는 순서(“미리암과 아론”)를 보건대 아마도 미리암이 구스 여인과 결혼했다는 비방의 선봉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대조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리암의 구스 여인을 향한 그 비방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스 사람은 검은 피부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그 검은 피부의 여인을 비난한 미리암은 나병으로 인해 하얀 피부의 여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11장에서 살펴본 메추라기 사건의 이미지와도 통하는 장면입니다. 부족함에 대한 원망의 결과 차고 넘칠 만큼 얻게 되었으나 막상 그 원망하던 사람들은 이를 누려보지도 못했습니다. 검은 여인을 비난한 여인은 희게 되었으나 사실상 그것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비방의 결과 그 원망과 비방과는 표면적으로 정 반대의 결과 즉 원망과 비방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그 속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나병 환자의 처리규정에 따라 진 밖에 칠일간 두게 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군하지 않았고 미리암이 완쾌되자 진 안으로 들어왔고 행군을 시작합니다. 미리암에게 내리신 진노(나병)가 백성들로부터 끊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들이기 위한 것이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5) 아론과 미리암의 비난에 비추어 모세의 온유함을 생각해 봅시다.
12:3
참고. 마태복음 11:29
자신의 친 형과 친 누나에게 비방을 받았던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온유함은 겸손함과 같이 등장할 때가 많은데, 약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전쟁에서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인데, 온유한 사람(약한 사람)이 땅을 차지할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산상수훈의 깊은 의미까지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이 온유하다는 표현은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지 않습니다만 겸손하다는 말은 흔히들 씁니다. 충분히 칭찬받거나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이루었거나 어떤 계획을 성공적으로 세웠는데 사실 내 힘이나 내 돈으로 한 게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돕고 투자해서 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써서 성공시킨 계획이라면,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이 아닌 이상 겸손해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마태복음 11:29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내세우십니다! 이 선언 자체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짐짓 자신감 넘치고 과시적으로까지 보입니다. 그런데 또한 성경에서 나는 온유하다 나는 겸손하다고 선언하신 분도 예수님 한 분 뿐이시기에 온유함과 겸손함이 무엇일지 논하려면 결국 하나님이신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께서만이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게 참다운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잘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시던 방편은 꿈, 환상, 직접계시였는데 유일하게 모세만 하나님과 대면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리에 불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스라엘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대로 하고 그 내용을 전하는 것임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의 온유함, 당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온유함과 겸손함의 결정체인 하나님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대면”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따라서 3절에서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단순히 모세의 타고난 성격, 광야생활에서의 경험이 가져다 준 지도자로서의 길러진 덕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하나님을 잘 알게 되어 얻게 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유치한 비유이겠습니다만 감기가 전파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만 온유하시고 모세는 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서 하나님의 온유하심에 감염된 셈입니다. 여기에 모세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늘로부터 온 온유함은 비난과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하고 삼가고 흠모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하늘로부터 온 모세의 온유함(약함)을 오히려 비방하기 좋은 대상으로 파악했습니다.
6) 미리암은 누구입니까?
참고. 출애굽기 2:7, 15:19-21
대제사장 아론에 비해 미리암은 우리에게 조금 낯선 이름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물에 떠내려가던 아기 모세를 이집트 공주가 구해내자 달려가서 자신의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하는 사람이 바로 모세의 누나 미리암입니다. 단편적인 장면입니다만 그 당시 절대권력앞에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꽤 호기로운 사람이리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출애굽기 15:19-21을 보면 미리암을 “선지자”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모든 여인들에 앞서서 북을 치고 노래를 지어 부른 것으로 보아 오늘날 여성지도자의 위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 대제사장 아론과 선지자 미리암에 비해서 모세의 독특함은 무엇입니까?
12:6-8
참고. 출애굽기 24:10-11, 33:20-23,
시편 17:15
대제사장 아론, 여성지도자이자 선지자인 미리암, 이 둘의 위치도 물론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 중에서 높임과 존경을 받을만한 자리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20-23을 보면 모세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인간이 영광스런 신의 모습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실상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대면”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얼굴을 뵙길 원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뜻일까요? 출애굽기 24:10-11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 뵙고” 먹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상의 대면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그 영광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성경에서 대면한다고 말합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누릴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자리에 모세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잘 깨닫는다면 모세가 아니라 누구든 온유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로 불러주셨기에 누구보다도 높은 모세,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누구보다도 온유한 모세입니다. 이러한 하늘로부터 오는 높음과 온유함을 입은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결국 이를 주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런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다.
8)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24:8-9
신명기 34:10
호세아 12:13
히브리서 3:1-6
이 사건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고별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전해준대로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병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면서 미리암을 슬쩍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적 권위를 힘입은 모세를 비방해서 혼쭐났던 미리암처럼 되지 말라는 것인데, 아무런 설명없이 이름만 언급해도 대표적인 사례가 될 만큼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 미친 효과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자! 그러한 모세의 교훈을 잘 지키자! 이렇게 말입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여파는 모세의 권위가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4:10을 보면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이후에 없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만큼 모세의 영향이 컸고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얻게 된 권능과 위엄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사소한 비방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결국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잘 드러내었고 그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러일으키게 된 셈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에 덧붙여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고 “한” 선지자로 보호받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한 선지자는 두말할 나위없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모세를 일컫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 생각을 토대로 볼 때,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브리서 3:3)는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 짓을 꾀하던 미리암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데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분이 모세와 비교하자면 집과 집을 건축한 사람처럼 비교불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했고 이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도 마찬가지로 비교불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종처럼 고작 가끔씩 하나님께서 부르셔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던 모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며 하나님을 늘 누리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모든 영광 버리기까지 순종하시는 하나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칭송받는, 그에 대한 비방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진노하기까지 해 주신 모세와는 비교불가할 정도로 높은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아들로 불립니다. 그리고 이 아들 덕택에 우리 역시 종이 아니라 “아들”로 불립니다! 구약을 읽으며 모세의 모든 영광과 권위, 삶과 경험이 참 놀라웠고 위대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아들됨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랍고 위대한 것임을 또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