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행군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1)
민수기 3장, 6장
인구조사, 진의 편성, 행군 순서도 정해졌습니다. 이제 행군만 하면 될 것 같은 이스라엘이 몇 가지 준비를 더 하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조금씩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3:1-4에 등장하는 나답과 아비후의 이야기는 레위기 9-10장을 말합니다. 레위기 성경공부에서는 이 부분을 살펴보지 않았으니 이 내용을 함께 살펴봅시다.
3:1-4
레위기 9-10장
민수기 3장1-4절은 시간 순으로 보아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아론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첫째와 둘째였던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이는 레위기 9-10장에 나와 있는 사건을 말합니다.
레위기 8장을 보면, 아론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제사장으로 세우는 7일간의 제사장 위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9장에는 이런 위임식이 마친 다음날,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백성 앞에서 처음으로 주관하는 첫 제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9장 후반부인 22-24절을 보면, 이 제사가 다 마친 후 아론이 백성에게 손을 들어 축복했고, 이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제물을 직접 불로 태우셨습니다. 모두가 모인 첫 제사였습니다. 모일 때는 두려움도 있을테고 호기심도 있었을 겁니다. 처음 보는 제복을 입은 제사장의 집전은 엄숙하면서도 거룩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입니다. 제사가 마치면서 제사장이 했던 축복은, 민수기 6장 22-27절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참고. 민수기 6:22-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제물을 바친 백성들에게 제사가 마친 후 내린 이 제사장의 축복은,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두려움 호기심 기타 어떤 감정으로 제단에 나왔을지 모르지만, 제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네가 제물을 바치는 하나님은 무섭고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네게 복을 주고 은혜 베풀고 평강 주기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선언 바로 뒤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다 태웁니다. 백성들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가시적인 표현입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제단 앞에 나왔건, 내가 제물을 바친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바친 제물을 직접 받으셨다는 증표를 눈으로 보게 된 백성들이 놀람과 두려움, 기쁨, 전율 등으로 크게 소리치며 그 앞에 엎드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겁니다. TV, 인터넷, 전화, 영화 등등 우리가 쓰는 어떤 매체도 없던 시대에 자신의 눈과 귀로 볼 수 있는 이 장면에서 백성들의 감격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을 수준이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9장의 분위기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분위기를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 10장 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성막을 세운 때가 1월1일이었고, 바로 위임식과 첫 제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1월8일 이후일 겁니다. 그런데 민수기에 등장하는 인구조사가 2월1일이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첫 제사로부터 3주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한 가지 추론은, 이 기사가 이어지는 바로 다음 구절인 8-9절에서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정 중에 한 가지인 술 취하지 말라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그래야 (즉, 제 정신이어야)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것을 잘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와 생활 전반에 걸쳐 제사장이 여러 판단을 할 때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 에베소서 5:15-21
에베소서 5장 15-21절을 보면, 술에 취하지 않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 그래야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지금 살핀 레위기 10장 8-11절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나답과 아비후가 술취한 상태로 제사를 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술에 취했든 아니었든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나답과 아비후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타 죽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 (당연하겠습니다만) 6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우울하고 슬퍼합니다. 제사와 제물을 태운 하나님의 불로 한껏 달아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가, 같은 하나님의 불로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이 원인 제공자가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불을 준비했다는 것, 다시 말하면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표현대로라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이렇게 분별력과 이해력이 있어야 할 이유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사의 목적은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제물을 받으심으로써 백성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에 있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에게 기쁨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전율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이를 제사장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슬픔이 찾아옵니다. 동일한 불로 태우시는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레위기 9장과 10장의 대비입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 3:4에서는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풀어쓰자면, (원래 첫째와 둘째여서 아론의 일을 물려받아 제사장으로서의 백성들의 제사를 집전하고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리여야 하는) 나답과 아비후는 (지금 인구 조사를 하며 행군 준비를 하는 이 자리에까지 오지도 못하고) 시내 광야에서 (분별력과 이해력이 있어야 하는 제사장이 오히려 그와 반대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백성들에게 기쁨과 전율 두려움과 감격을 안겨주었을 그 불을 하나님께서 다시 내리셔서) 여호와 앞에 죽어 (그래서 제사장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으며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론의 다른 아들들을 세우셔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의 가르침을 받아)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잘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잘 드러내기 위해 제사장이 제대로 일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행군을 준비하는 이 곳 이 순간에 말입니다. 이런 뜻을 살필 수 있습니다.
참고. 누가복음 24:50
누가복음 24장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의 기록이 나옵니다. 베다니 근처까지 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장면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역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매체들이 없었던 시대를 살던 제자들이 누군가 손을 들어 축복하는 장면을 봤다면 그 중 하나는 제사장이 제사가 끝난 다음에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동물의 피와 살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린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그저 자기 몸이 불살라졌을 뿐인 나답과 아비후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축복하십니다. 제사장의 입을 통해 대신하시지 않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평강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당신이 직접 축복하십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을 보고 소리 질렀던 민수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감격과 전율, 그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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